사천 원어치 글

2019. 1. 15. 23:59글쓰기 우당탕탕

  

  카페에 갔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두피디아 여행 작가 협의를 위한 글인데, 그동안 다녀왔던 여행기를 정리하고 앞으로 갈 여행에 대한 글을 쓰면 되는 거였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다녀온 곳이 많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래도 천천히 정리를 해보자. 수첩을 펴 연필로 목차를 적었다. 영화제 가는 걸 좋아해서 부산, 전주, 제천, 무주에 다녀왔다. , 꽤 자주 갔잖아? 부산은 영화제 때문에 두 번을 갔고 여행으로는 따로 두 번을 더 간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로 여행도 다녀왔다. 8일 동안. 제주도에는 총 세 번을 다녀왔다. 그중 최근에 다녀온 여행은 한 달을 살았고. 일본 오키나와도 가봤다. 이 정도면 적을 내용이 있겠다! 안도했다. 쓸 이야기가 너무 없어서 여행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금세 희망을 찾았다. 나도 여행 작가 될 수 있어! 시켜주세요! 마음으로 외쳤다.

  말차라테를 주문했다. ‘말차라테 5(4)’라고 메뉴판에 적혀있었다. 오천 원이라 생각하며 카드를 내밀었는데 사장님은 사천 원 결제해드릴게요, 라고 말했다. 오후 2시 전까지 주문하는 음료는 천 원씩 할인이 된다고 했다. 12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사장님은 덧붙였다. 대신 6시 반 전까지는 돌아가셔야 해요. 저녁 드실 시간 전에는말끝을 흐렸다. , 네 알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천 원을 할인받은 기분이었다. 저런 말을 기분 안 나쁘게 할 수도 있구나. 친절한 듯 자신의 요구를 제대로 말하는 말투잖아? 나도 저렇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노트북 전원을 켜 한글파일을 열었다.

  수첩에 적어 놓은 걸 보고 글을 썼다. 운을 떼는 첫 문장을 쓰고, 살을 붙이고 사진을 첨부했다. 다녀온 여행에 대해선 자세히 적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타닥타닥 카페 내부에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문장을 고치고 보기 좋은 글씨체를 찾았다. 그러던 도중 29cm 홍콩 리포터에 지원한 결과를 확인했다. 결과는 당첨이 안 됐다. 조금 힘이 빠졌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안 돼. 온 지 두 시간 반밖에 안 됐잖아. 카페에서 글을 쓸 때는 내가 정한 기본 시간은 세 시간이다. 최대가 네 시간이고. 그 이상은 못 있겠다. 허리와 엉덩이가 쑤시고 눈이 침침해지니까. 하지만 그 전에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내가 지급한 돈 만큼은 쓰고 돌아가자고 생각한다. 음료값만큼은 쓰고 돌아가자고.

  난 투자한 만큼 대가를 바라는 사람이다. 헬스장에 등록하면 꾸역꾸역 주 5일을 출석하고, 무릎이 아파 운동을 못 할지언정 스트레칭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이다. 요가를 등록하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다. 입술이 터져도 간다. 밥 먹을 시간이 애매해 주린 배를 부여잡고 다운독 자세를 할지언정 등록한 날만큼은 딱 채우고 그만둔다. 투자한 돈이 있으니 도저히 아까워선 안 가곤 못 배기는 거다. 이런 짠순이 기질이 있는 나에겐 글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그랬다. 4천 원 어치의 글을 썼다. 억지로라도 쓰게 만들었다. 한 시간에 내가 얼마를 쓴 거지. 계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카페로 가기도 한다. 말차를 먹었으니 뽑아내란 말이야! 그렇게 머리를 굴려 4~6천 원 어치의 글을 쓴다. 오늘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사천 원.

  나를 닦달하지 않아도 글이 술술 나오면 좋으련만. 그럴 때가 간혹 한두 번 있긴 했지만, 대부분 아니다. 앞으로도 매일 다른 가격만큼의 글을 쓸 예정이다. 더 느슨하게, 때론 더 날 몰아세우면서. 미련하고 계산적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