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너만큼의 온기

2019. 2. 4. 23:59에세이 하루한편


뜨겁던 8, 제주도 동쪽에 집을 빌려 한 달 동안 지냈다. 바닷가 마을에 위치한 옛 농가주택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집이었다. 마당을 사이로 안거리엔 주인댁이, 밖거리엔 내가 살았다. 마을 어디서나 돌담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마당엔 평상과 작은 텃밭이 있고 초록색 지붕과 초록색 현관문이 예쁜 집이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9월 첫날의 저녁, 하얀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돌담을 폴짝 넘어 야옹야옹 말을 걸었다. 처음 한 인사치고 꽤 살가웠다. 내 다리에 머리를 부비고 풀썩 누워 배까지 보이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찾아봤다. 급한 대로 락토프리 우유와 계란을 삶아주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 먹었는지 그루밍을 했다. 길고양이지만 깨끗했다. 전체적으로 하얗고 군데군데 노란색 털이 있었다. 눈동자는 짙은 호박색이었다. 어깨 죽지에 뼈가 들어날 정도로 마르고 꼬리 끝은 살짝 말려있었다. 첫 만남에 계란을 줬으니 노른자의 른자로 이름을 지을까 하다가 언뜻 보면 털이 하얀 것이 꼭 무 같아서 순무라고 부르기로 했다. 순무는 그날 이후로 매일 찾아왔다. 야옹, 하고 울면 밖으로 나가 우유를 주거나 계란을 줬다. 며칠 본 것뿐인데 정이 들어 사료를 사서 주었다. 다른 고양이 가족들도 찾아와 여기 있을 때만이라도 잘 챙겨주자 싶어서였다. 그러자 순무는 오고 싶을 때마다 왔다. 새벽 6시 반일 때도 있고 오전 8시 반이나 9시 반일 때도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두 번씩 올 때도 있었고 매 끼니때마다 오던 날도 있었다.

비가 왔는지 마당 바닥이 축축했고 습했던 날, 순무가 문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혹시나 해서 방충 문과 현관문을 다 열어 두었더니 집 안으로 들어왔다. 비몽사몽인 채로 사료와 물을 주었다. 누가 뺏어 먹지 않아서인지 순무는 자리에서 내가 준 사료를 싹 다 먹고 물도 먹었다. 벌레가 들어올까 방충 문을 닫았다가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열어주었다. 몇 번 집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던 순무는 안으로 들어와 잠을 잤다. 난 그 옆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순무는 그루밍을 하다가 옆으로 누워 두 팔을 쫙 뻗고 눈을 감았다. 그르릉 소리를 냈다. 자세를 왼쪽, 오른쪽으로 뒹굴뒹굴하며 바꾸기도 하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잠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자세를 고쳐 거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열린 문틈 사이로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순무는 내 곁에 누워 두 다리를 올리고 잘 준비를 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깊게 잠들었는지 잠꼬대를 했다. 수염이 부르르 떨리고 몸이 움찔거렸다. 한없이 깊은 잠에 빠진 이 고양이를 바라보자니 웃음이 났다.

순무는 그 뒤로 몇 번 더 집안에 들어와 낮잠을 자고 갔다. 그러곤 마당에 잠시 앉아있거나 돌멩이를 손으로 밀며 놀았다. 풀을 뜯어먹기도 했고 돌담을 성큼성큼 올라가 지붕 위를 거닐기도 했다. 대문을 나서 가로질러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가기도 했다. 제주를 떠나기 전 날 밤, 순무는 거실 바닥에 앉은 내 무릎에 기대 잠을 잤다. 배고픔을 잠으로 잊겠다는 듯이. 그 날의 오전처럼 순무와 맞닿은 다리가 따뜻했다. 잠에서 깬 순무는 밖에 나가겠다며 야옹, 하고 말을 걸었다. 문을 열어 주고 다시 앉은 카펫이 따뜻했다. 딱 순무가 누웠던 크기만큼. 내 손과 발을 대보았다. 나는 그것이 얼른 사라지지 않게 잠시 가만히, 그대로 있었다.

다시 서울이다. 날이 갈수록 공기가 차갑다.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으며 구부정하게 걷는다. 그럴 때면 잠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살을 맞대고, 시간을 나누던 그 때를. 너에게서 전해지던 따뜻한 온도와 네가 떠난 자리에 남아있던 온기를. 그 평안한 시간을 떠올리면 나는 왠지 모르게 다 괜찮아질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너는 위로였다. 난 그 기억을 꺼내 가끔 마음을 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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