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흐름대로 보낸 하루

2019. 2. 15. 23:59에세이 하루한편

 

한 달에 한 번 오는 피의 날이다. 아랫배는 알싸하게 아프고 욱신거린다. 가끔 움찔거리는 통증까지 찾아오는 날이라 약을 먹었다. 약을 먹는 게 시간을 아끼는 일이니까. 알약을 잘 못 먹는 나는 생리통약 한 알을 몇 번의 시도 끝에 먹고선 찜질팩을 찾았다. 할머니 허리 찜질을 하시라고 엄마가 사다 둔 찜질팩이었다. 전자레인지에 130초가량 돌리고 수건에 돌돌 말아 아랫배에 대고 누웠다. 자세를 바꿔 허리에 놓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올 듯 말 듯한 몽롱한 기분으로 얼마나 누워있었을까, 조금씩 괜찮아지는 걸 느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폈다. 며칠째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잡아두고 싶었는데 그 뜻은 책을 읽고 싶다는 뜻과도 같았다.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폈다. 2010년도 제1회였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었다. 눈이 와서 그런지 밖이 조용했다.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은 해가 저무는 때처럼 어둑어둑했다. 이런 날은 책 읽기 좋은 날이지.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며 읽었다. 집중이 잘 안 될 땐 소리 내어서 읽기도 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다. 갑자기 영화 속 장소 어딘가에서 뚝 떨어져 내 눈으로 그 장면을 직접 보는 기분이 드는 거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건 즐거운 일이다.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압박이 들 때만 빼면. 현재를 잊을 수 있어서 좋다. 단편 소설 두 편째 읽을 때 즈음 책장을 덮었다. 배가 고팠다.

떡국을 끓여 먹으며 예능을 봤다. 오늘은 딱히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므로 손이 가는 대로, 생각의 흐름대로 시간을 보냈다.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갑자기 비욘세(Beyonce) 노래가 듣고 싶어 뮤직비디오와 가사를 찾아봤더니 어느새 밤이다. 잔잔한 연주곡만 듣다가 가사와 멜로디가 있는 노래 곡을 들으니 시원했다. 그것도 층간소음이 걱정되는 힙합을 들으니. 평소 같았으면 하루를 이런 식으로 보낸 걸 후회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굳어있던 다른 쪽 감각을 톡톡 건드려 깨운 느낌이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정리가 됐다. 내일 일정이며 약 한 달의 큰 틀이. 환기를 시켰나 보다.

오늘도 느꼈다. 가끔은 부담 갖지 말고 시간을 보내자고. 그리고 똑같은 하루 속에서 가끔은 잊고 있던, 또는 새로운 안 하던 짓하나씩 시작하자고.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한 오늘이 말해준 한 가지 이야기다. 그래, 그동안 고민하던 안 하던 짓또 하나 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으니 나쁘지 않은 날이다. 오래 고민하던 뭔가는 이렇게 짧은 찰나에 결정 내리기도 한다.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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