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양이라면

2019. 4. 9. 23:48에세이 하루한편

카페에서 글을 썼다. 정확히 말하면 지원서다. 인문 360도 사이트에서 뽑는 시민기자단 인문쟁이 5기 지원서를 썼다. 예시 원고와 내 소개 글도 적었다. 어떤 글이든 쉽게 쓰이는 건 없다는 생각이 없었다. 세 시간을 붙잡고 늘어졌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엔 오후 9시부터 내린다고 했지만 4시쯤이었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까지 불어 창밖에 나무가 마구 흔들렸다. 따뜻한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으슬으슬 추워져 주인에게 말했다. 주문한 아이스 초코가 금방 동이 나도록 글을 썼다 지우니 눈이 침침해지는 것 같았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글을 썼지만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한 번만 더 수정하면 될 정도로 글을 마무리 짓고 가방을 쌌다. 우산이 없었으므로 집까지 뛰어가야 했다. 노트북과 충전기, 마우스를 가방 안에다 넣고 앞으로 맸다. 물이 닿아 고장이 나면 안 되니 손으로 가리고 갈 심산이었다.

일기 예보가 맞았던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까지 뛰어갔다. 주택이 늘어선 골목 중간에 위치했고 처음 가보는 카페라 지도를 보며 갔었는데 올 때는 한 번에 찾았다. 정신을 집중하면 길도 잘 찾아지는 건가. 모자를 써서 다행이다, 머리는 안 빠질 거야. 잡생각을 하는 머리 위에 비를 맞았다. 가방에도, 어깨에도 바지에도 비를 맞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신호등 앞 가게를 덮고 있는 차양에 몸을 숨겼다. 그제야 바닥에 튕기는 빗소리도 축축한 느낌도 잠깐 쉬어간다. 차양. 나는 차양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는 문장을 어디선가 읽고 나서부터 그랬다. 그러나 햇빛과 비를 가려주는 차양이 이렇게 현실감 있게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다시 후다닥 달려간다. 집에 돌아와 언 몸을 녹이며 저녁을 먹는다. 곧 가족들이 집에 돌아와 정신없이 저녁을 먹을 것이며 난 그 식사에 가담하고 싶지 않다. 내 한 몸 편히 숨길 수 있는 차양은 생각보다 자주, 절실히 필요하다. 내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곳이. 그럼 잠시 숨을 거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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