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사람들

2019. 4. 28. 23:46에세이 하루한편

 

방을 바꿨다. 현관문 바로 옆인 큰방에서 주방과 화장실에 맞닿아있는 작은방으로. 이 집에서 16년간 살았으니 최소 몇 년간 쓰던 걸 바꾼 셈이었다. 현관문과 맞닿아있어 문소리가 시끄러운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층간소음 때문이었다. 주말 아침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목소리와 금복이가 짖는 소리가 제일 잘 들리는 방이어서다. 소음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 며칠째 숙면을 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홧김에 방을 바꾸겠다고 선포했다. 지금이 아니면 계속 흐지부지될 것 같아서. 작은 방은 다용도실이어서 짐이 많았다. 갈 곳 없는 전자레인지부터 책이 빼곡한 책장과 책상, 아빠의 옷장까지 있는 방. 엄마의 공부방이자 아빠의 혼술을 하는 공간이었다. 새벽 퇴근을 하는 날이면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에 혼자 있던 곳이기도 하다. 코딱지만 한 방에 짐이 한가득 이어서 더 넓은 방으로 옮기면 나도 좋고 아빠에게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작은 방에 있던 수십 권의 책과 책상, 옷장 안에 들어있던 옷가지들과 온갖 서류들을 옮겼다. 책이 많아 두 줄씩 겹쳐서 꽂아놓은 책장은 정리가 필요했다. 만화책이나 동화책, 10년 이상 지나버린 큐티 시리즈와 문제집들은 한쪽에 빼두었다. 약 세 시간에 걸쳐 가구를 옮기고 바닥을 쓸고 닦고를 반복했다. 옷장을 여기 둘까 저기 둘까 고민하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꿨다. 힘이 쭉 빠져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을 정도였다. 위치를 정하니 그런대로 봐줄 만 했다. 나머지는 천천히 정리해도 될 정도였다. 퇴근해서 돌아온 아빠는 달라진 방에 적응이 안 되는지 책이 다 뭐냐며 핀잔을 주었다. 도대체 방을 몇 번째 바꾸는 거냐, 집안이 정신이 없어진다, 너 때문에 골치 아프다 등등. 그동안 방을 여러 번 바꾸고 같은 방에서 가구의 위치를 기분 내키는 대로 바꾸던 터라 할 말이 없었다.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 내가 말했다. 아빠는 자신의 동의 없이 방을 바꾼 것에 대해 서운함을 표했다. 아빠는 대신 이제 여기 쓰면 돼. 방이 넓으니까 더 좋지? 난 이렇게 말했지만, 아빠의 반응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의 의사를 들어보지도 않고 버릴 책이라며 한쪽에 모아둔 것도 맘에 들지 않아 보였다. 버리는 게 아니라 아빠가 한번 보고 고르라고 빼놓은 거야. 버린 건 한 권도 없어. 그러나 아빠는 본인이 어딜 가나 찬밥신세라고 한탄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자기만의 방이란 게 있잖아. 아빠는 컵에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자기만의 방. 아빠의 입에서 나오니 낯선 단어였다. 아차 싶었다. 내 눈에 잡동사니가 가득한 공간으로 보이던 곳이 아빠에겐 온전한 자기만의 공간이었다. 옷이 널브러져 바닥에 떨어지고 서류뭉치 가득한 박스가 구석을 차지하고 있어도. 나에게도 나만의 방이 필요하듯 아빠에게도 필요했던 거였다. 당연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빠는 어떤 방이든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누구나 자신의 방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는 더더욱 내 공간이 간절하다. 문자 그대로다. 내 방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싶다. 누구라도 그럴 거다. 본인의 공간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에는 아빠도 포함이었다.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걸까.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하루빨리 독립해서 이 방을 잘 꾸미고 나가야겠다. 아빠의 공간으로.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어서 자기만의 온전한 방이 생기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아도 편안한 공간이 생길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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