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이 준 두 가지 깨달음

2019. 5. 12. 23:52에세이 하루한편

어렸을 적 알약을 먹다 토했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목에 걸린 약 때문에 방바닥에 토사물을 쏟아낸 기억이다. 어쩌면 내 기억의 오류인지도 모르지만, 알약을 삼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건 분명했다. 아주 작은 게 아니면 삼키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새끼손톱의 반만 해도 덜컥 겁이 났다. 꼭 먹어야 하는 약이면 어쩔 수 없었다. 알약을 입안에다 넣고 물을 마셨다. 알약이 입천장을 스치고 혓바닥에 닿을 때면 무서웠다. 다시 목에 턱 하니 걸릴 것만 같았다. 한참을 씨름하다 고개를 치켜들어 가까스로 꿀떡 삼켜보면 목구멍 언저리에서 겨우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목에서 느껴지는 약의 거친 질감에 깜짝 놀라곤 했다. 콜록콜록 마른기침을 해댔다. 도저히 삼키지 못해서 반을 자른 약은 더 날카로웠다. 점점 더 두려웠고 더 많은 물과 시간이 필요했다.

도저히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아 몇 년 전까지도 약을 처방받으면 가루약으로 부탁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쓴 가루약도 먹는 게 순탄하지 않았다. 내과에서 처방해주는 약은 어찌나 쓴지 이 세상의 쓴맛은 다 내가 느끼는 것 같았다. 알약을 먹는 이유가 다 있네, 있어.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언제까지 가루약을 먹을 순 없으니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함부로 잘라 먹거나 갈아먹으면 안 되는 약도 있으니 삼키는 노력을 해야 했다. 괜찮아요. 알약 못 먹는 사람들도 많아요, 어떤 약사는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입을 모아 알약 먹는 연습을 하는 게 좋다고 했다. 약의 복용법이 달라지면 약의 효능과 효과가 떨어진다는 점 때문도 그랬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된 내가 가루약을 먹는 상상을 하자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다. 그때가 되면 먹어야 할 약이 많을 텐데. 매번 가루약을 먹는 건 생각 속에서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알약을 입에 넣고 잘 삼키는 상상도 해봤다. 사실 난 알약을 엄청나게 잘 먹는 아이였던 거야. 내 머릿속에 남은 건 어쩌다 한 번 생긴 안 좋은 기억이었던 거지. 이렇게 생각하니 알약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알약을 먹으면 목이 꽉 막힐 것 같고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씨앗이었다. 작은 것부터 삼키는 연습을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 말고 숙인 상태에서 삼키면 더 잘 넘어간다는 법도 터득했다.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 알약을 먹게 됐다. 신기한 일이다. 상상의 효과일까. 갈수록 나아졌다. 지금도 연습은 진행 중이다. 크기가 큰 캡슐이나 타이레놀 같은 건 입에 넣으면 겁부터 나니까. 그럴 때면 난 다시 상상한다. 난 지금 사막이다. 목이 너무 마른 데 이 약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그럼 시간이 오래 걸려도 꿀떡, 삼키게 된다.

알약 때문에 깨닫게 된 건 여러 가지다. 그중 첫 번째는 때론 두려움이 모든 걸 창조한다는 거다. 생각과 육체를 지배해서 그 어떤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도. 그럴 때면 사막 한복판에서 목이 마른 할머니를 생각한다. 생각을 고칠 수 없으면 상상을 하자. 약이 내게 준 두 번째 깨달음이다상상만큼 초월적인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게 하는 것도 없을뿐더러 효과가 좋은 것도 없으니 말이다. 내일도 난 아침 약을 먹으며 무언가를 상상할 예정이다.

(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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