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근원, 분노

2019. 5. 21. 22:15글쓰기 우당탕탕


한국문화번역원의 주최로 열린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행사에 다녀왔다. 내가 궁금했던 주제는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이었다. 행사장에 도착해 이름을 확인하고 입장했다. 행사장 앞에서 통역기를 빌려주고 있었다. 이게 필요한가? 한쪽 귀 전체에 꽂을 수 있는 커다란 이어폰 줄이 네모난 무전기 같은 물체에 둘둘 감겨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 행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이 모이는 자리라는 걸 잘 몰랐던 거다. 곧이어 심보선 시인이 사회를 맡고, 덴마크 작가 마야 리 랑그바드, 일본 작가 최실, 한국 작가 강영숙 이렇게 네 명의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다.

포럼이 시작됐고, 마야 리 랑그바드 작가부터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덴마크로 입양됐고, 그곳에서 성장하며 느꼈던 입양에 대한 생각들이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책 그녀는 화가 난다에 나오는 일부분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작성한 설문조사표 20문항을 읽기도 했다. 영어로 읽기 시작하면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한국어로 번역이 됐고, 사회자가 한국어로 다시 읽어주는 형식이었다. 뒤이어 최실 작가도 자신의 아픈 개인사를 꺼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그 사실을 이 순간 모든 사람이 알아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마저 드는 이야기였다. 작가의 아픔이고 슬픔이고 분노였다.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주제에 개인사를 이야기하는가,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강영숙 작가는 우리가 글을 쓰게 된 공통적인 이유는 분노때문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다. 내 슬픔과 분노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감정을 글로 써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과거를 떠올렸다. 그래, 그래서 나도 그렇게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지. 뭐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순간이 있었지. 세 시간 동안 이어진 포럼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왜 작가들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로, 목소리로 듣는 글은 통역 없이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떤 힘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순 없어도 떨리는 목소리나 몸짓으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작가와 만나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작가와의 만남이었다. 이상한 만남이지만 어렴풋한 무언가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언어의 다양성만큼 우리 외면의, 내면의 문제는 너무나 다양해서 제각각의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너무나 비슷해 보였다.

왜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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