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와 만나기

2019. 6. 7. 23:50에세이 하루한편

 

J를 만났다. 내 책 <겨우 한 달일 뿐이지만>을 다 읽었다며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문장이 좋았는지를 짚어주었다. 손으로 숫자를 세어보니 지금으로부터 9개월 전의 내가 쓴 글이었다.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았던 경험을 담아낸 글. 책에 대한 대화는 계속됐다. J가 무언가 질문하면 다시 서울 토박이로 돌아온 내가 답변을 하는 식이었다. 현재 나의 삶은 막막함과 어설픔, 긍정과 부정 그 어디쯤이었다. 잘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고 또다시 시간이 지나면 더 자리를 잡을 거라고 날 위로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중이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달라져 있었다. 그런 내가 제주에서 얼마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쉬었던 사람이었는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던 사람인지가 떠올랐다. J는 나를 9개월 전의 나와 만나게 해준 거였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내고 내가 원하는 모습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J는 나에게 제주도에서, 자연 곁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몰랐다.

맞아. 그래서 계절별로 제주에 내려가서 조금씩 지내볼 거라고, 이번 겨울엔 조금 오래 내려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J는 내 책을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책 모서리를 접어놓은 표시와 밑줄을 친 부분이 군데군데 보였다. 잠시 책을 후루룩 훑어본 뒤 다시 내려놓았다. 9개월 전의 내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었다. 책을 입고하기 위해 포장을 할 때와는 다른, 내 방 책장 위에 올려놓은 책과는 다르게 보였다. 너무나도 달랐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내 책은 또 다른 나처럼 느껴졌고 내 생각이 사물의 모습으로 변신한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 위 가만히 놓인 책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 두려움을 잠시 잊고 용기의 편을 들어봐. 네가 잊고 있던 네 모습을 떠올려봐. 네 마음속 깊은 곳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했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웃음 지었다.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니. 지금에야 널 만났구나. 그래, 그래 볼게.

책은 다시 J의 가방으로 들어갔다. 대화의 주제는 금세 바뀌었고 우린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책을 봤던 짧은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아주 느리고 길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내 미래에 대한 그림을 희미하게나마 그릴 수 있었고 과거의 나, 9개월 전의 나를 볼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걸어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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