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만의 중간고사

2019. 6. 16. 23:50에세이 하루한편

 

엄마가 약 35년 만에 중간고사를 봤다.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으니 사회복지사에도 도전장을 내민 거다. 5월 시작인 수업을 위해 평생 안 사던 형광펜과 필기도구, 공책 수십 권을 사가며 준비를 했다. 엄마는 학점이란 걸, 교양 선택과 교양 필수라는 단어를 처음 실감했다. 상업고등학교 졸업 이후 바로 취직을 한 뒤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 2급 취득 과정은 온라인으로 운영되는 학점은행제였다. 엄마는 여덟 과목을 듣겠다고 했다. 궁금하거나 어려운 게 있으면 담당자에게 전화했고 항상 노트북 앞에 끙끙댔다. 6월부터는 수업을 들으면서도 요양보호사로 첫 출근을 했다. 일주일에 세 번, 서너 시간씩. 그리고 15년 넘게 해온 아르바이트와 병행했다. 컴퓨터 수업과 미술치료 수업도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들었다. 얼굴 볼 시간이 없어. 아주 그냥 연예인 스케줄이야, 아빠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엄마는 참 열심히 했다.

새벽부터 돋보기안경을 쓰고 동영상 강의를 듣고 형형색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쳐가며 공부를 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대단하다 싶었다. 몸이 열 개라도 바쁜 엄마는 즐거워 보였다. 뭐가 힘드니. 엄마는 말했다. 컴퓨터 수업에선 파일을 압축하는 법을 배웠고, 블로그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USB에 사진 옮기는 것을 배웠고, 네이버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리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미술 수업 시간엔 선풍기, 오징어, 바구니, 액자, 해바라기 등등 다양한 걸 직접 만들었다. 칠하고 오리고 붙이고 바느질했다. 엄마는 어느 날 책장 옆면에 그동안 만들었던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 몇 개를 붙였다. 일렬로 좌르륵. 파일을 사서 여태까지 만들었던 작품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꼭 나에게 잘했지? 물어왔다. 입가엔 미소가 피어있었다. 나는 일부러 이야, 잘했네. 과장해서 칭찬했다.

2년간 할머니를 돌보면서 얽매여있었던 고리가 탁 풀리고 나니 엄마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억눌러왔던 감정을 풀어나가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많아지고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비로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됐으니. 엄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나아가는 중이었다. 망설임 없이, 두려움 없이. 걱정과 염려도 없이. 부지런하게. 오늘도 그랬다. 중간고사 기간은 3일이었지만 엄마는 시간을 낼 수 없어 오늘 여덟 과목을 다 봤다. 나도 옆에서 엄마가 모르는 걸 도와줬다. 온종일 엄마 옆에 있었다. 아침 열 시 반에 시작한 시험이 오후 다섯 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점심과 간식, 휴식 시간도 포함돼있었지만. 맥이 풀릴 정도로 피곤했다. 시험이 다 끝나자 좀 눕자, 하고 안경을 벗은 엄마 콧대엔 붉은색 안경 자국이 나 있었다. 엄마가 스스로 남긴 배움의 자국이었다. 엄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세어가며 세상을 배우는 것 같았다.

난 그런 엄마를 보며 배운다. 인생은 좀 더 길게 볼 필요가 있음을. 매일 같이 울고 싶은 날이 있다면 온종일 웃게 되는 날도 있다는 것을.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인생은 너무 짧으니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망설임 없이 시작하라는 것을. 그럼 하루하루가 다르게, 여태껏 살아온 세상과는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