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세계에서 발버둥

2019. 6. 20. 23:26글쓰기 우당탕탕


내가 쓴 소설 합평을 했다.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어디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뭐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든지, 이런 표현은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든지 등등. 내가 놓친 것들에 대해 자세히 나누었다. 문우(라는 표현은 아직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들이 지적한 부분은 퇴고를 거듭하면서 쳐 낸 문장들이었다.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행동의 이유,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대한 정보 등등. 합평을 끝내고 나자 글 속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보여줘야 할지, 어떻게 가감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확실한 건 이거였다. 독자는 작가가 제공한 정보에 따라 반응한다는 거다. 그러니 책임질 수 있는 문장만 써야 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소설 속 인물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집에는 이주 뒤에나 올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이 인물은 집에 가끔 오는 사람인지, 이주마다 오는 사람인지, 아예 오지 않던 중 어쩌다 한 번 오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독자는 주어지는 지문에, 대사 하나에 궁금증을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에 작가가 설명할 게 있다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과감하게 없애야 한다. 필요하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는 거다.

애매한 문장을 남기면 독자는 왜 저런 문장을 썼지? 이 장면을 왜 넣었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고민하게 된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거다. 초점을 흐리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독자에게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해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숨길 필요도 없다. 찾아내는 즐거움을, 생각하는 즐거움을 줄 정도면 된다고 했다. 선생님은 쓰고자 하는 것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내가 뭘 쓰려고 하는가를 계속 되물어야 한다고. 합평을 마치고 나니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림이 그려지는 게 아니라 어지러웠다. 더 잘 다듬어진 글을 선보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내가 쓴 글은 시간적 배경이 17년의 기간과 현재를 오가며 회상이 인물의 주된 감정을 끌어낸다. 선생님은 이런 식의 글은 쓰기 어려운 글이라고 했다. 능숙한 작가들은 긴 시간의 일이라도 맥을 탁탁 잡는 데 비해 초보 작가들은 실수할 가능성이 높은 글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잘 쓴 글을 많이 읽고 써봐야 한다고, 긴 시간을 다루는 걸수록 감정묘사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감정은 흐르는 게 아니라 고여 있기 때문에.

알면 알수록 복잡해지는 소설의 세계였다. 그래도 내 글을 다시 고치고 다음 수업은 뭘 들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날 신이 나게 했다가 괴롭게 만들고, 좌절하게 했다가 그래도 혹시, 희망을 갖게 만드는 이 이상한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더 많이 공부할 생각이다. 더 많이 읽고 쓸 생각이다. 그럼 언젠간 나만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추신. 합평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다 들을 필요는 없다. 내가 지킬 건 지키고 수용할 건 수용하면 된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맞추려다 보면 내가 원래 쓰고자 했던 글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돼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엔 나를 믿는 게 중요하다. 작가로서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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