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덕분

2019. 6. 28. 22:57여행을 기록하자


결국 순무를 만나진 못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혹시 이 주변에서 흰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느냐 물었다. 제가 작년에 여기서 한 달을 살았는데요, 밥 주던 고양이를 보고 싶어서 왔거든요. 설명도 덧붙였다. 흐음. 그래요? 저도 저번에 여덟 마린가 여기 근처에서 봤었는데, 로드킬을 당한 건지 구역을 옮긴 건지 안 보이더라고요. 일 년이면찾기 어려우실걸요. 그래도. 내 머릿속엔 그래도라는 말이 둥둥 떠다녔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순무를 찾아다녔다. 동네를 누비며 고양이 세 마리를 우연히 만났지만 순무는 아니었다. 예전에 살던 곳을 세 번이나 가봤지만 없었다. 그 근처에서 순무야, 순무야. 불러도 없었다. 쨍하게 더운 낮과 바람 선선한 오후와, 깜깜한 밤. 이렇게 세 번을 갔다. 첫 번째 갔을 땐 두 번째 가면 있을 거라 생각했고 두 번째 갔을 땐 세 번째 갔을 때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두 다 틀렸다. 순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약 일 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구역을 옮긴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면, 아니면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 애써 밝은 생각을 꺼냈다. 고양이는 발정이 나면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니까. 잘 지낼 거야. 좀 귀여운 녀석 이여야지. 누구라도 먹을 걸 챙겨주고 싶은 고양이니까. 순무는 잘 먹고 잘 자고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찾은 김녕도 순무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그랬다. 짠내를 실어 나르는 바람도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낮은 집도,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동네도. 다시 찾을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은 잠시였다. 그 한 달은 순무와 함께 지내서 더 행복했던 거였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정을 많이 준 탓에 마음이 힘들었다.

당분간 순무 사진을 꺼내보지 말아야겠다. 그때가 더욱 그리울 것 같으니. 막연히 다시 순무를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다시 만난다면 더는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짐한다. 지금, 현재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온전히 느끼자고. 지금이 아니면 못 할 일들, 못 만날 사람들,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감정이 분명히 있으니. 현재를 충실히 기쁘게, 행복하게 살자고. 순무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가 더 늘었다. 순무를 통해 느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모두 다 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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