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19. 위안을 주는 오전의 고양이

2018. 9. 7. 23:58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19]
순무 그리고 비자림

1.고양이 순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9월 1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냥냥 거리며 다가왔다. 처음 한 인사치고 꽤 살가웠다. 배가 고픈 거 같아 나는 얼른 락토프리 우유와 달걀을 삶아 주었다. 고양이는 언뜻 보면 온통 하얗지만, 자세히 보면 노란 털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커피를 아주 조금 넣은 우유 같았다. 꼬리 끝은 살짝 말려있고 볼과 배가 홀쭉하게 말랐다. 노른자의 른자라고 부를까 하다가 털이 하얀 게 꼭 무 같아서 순무라고 부르기로 했다.


순무는 그날 이후로 배가 고플 때면 자주 찾아왔다. 야옹, 하고 예쁜 목소리로 울어 나가보면 연두색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집 앞에 앉아있었다. 마땅히 줄 것이 없어 똑같이 우유를 줬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순무는 볼일 다 봤다는 듯 몸을 단장했다. 그리곤 쓰다듬어 달라고 마당에 이리저리 뒹굴뒹굴하고 내 무릎에, 다리에 머리와 몸을 비볐다.

사료를 샀다. 순무 말고도 다른 고양이 가족들도 눈에 띄어서 여기에 있을 때라도 잘 챙겨주자 싶어서였다. 집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냥냥 소리가 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순무는 반갑게 마당으로 달려왔다. 스티로폼 통에 사료를 부어주자 까득까득 소리를 내며 먹었다. 입이 짧은 건지 손으로 쥐어다 입 아래 갖다 주면 잘 먹는데 바닥에 놔두면 도통 진득하게 먹지를 않아 상전 납셨네, 하며 몇 번 더 먹여줬다. 이렇게라도 먹어서 기뻤다.

오늘 아침 9시 즈음에 순무가 또 찾아왔다. 문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비가 왔는지 마당 바닥이 축축했고 습했다. 혹시나 해서 방충 문과 현관문을 다 열어 두었더니 집 안으로 들어왔다. 비몽사몽인 채로 사료와 물을 주었다. 누가 뺏어 먹지 않아서인지 순무는 자리에서 내가 준 사료를 싹 다 먹고 물도 먹었다. 벌레가 들어올까 방충 문을 닫았다.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문을 열어주었다. 몇 번 집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던 순무는 집안으로 들어와 잠을 잤다. 난 그 옆에서 졸음을 이기며 차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그루밍을 하다가 두 팔을 쫙 뻗고 눈을 감은 순무는 그르릉 소리를 냈다. 자세를 왼쪽, 오른쪽으로 뒹굴뒹굴하며 바꾸기도 하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로 잠에 빠지기도 했다. 난 그런 순무를 계속 바라봤다. 내가 화장실을 가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면 순무는 졸린 눈을 뜨고 상황을 확인했다.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면 다시 깊은 잠에 빠질 준비를 했다. 나는 자세를 고쳐 문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열린 문틈 사이로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순무는 내 앞에 누워 두 다리를 내 다리에 올리고 잤다. 깊게 잠들었는지 잠꼬대를 했다. 내 다리를 밀정도였다. 수염이 부르르 떨리고 다리도 움찔거렸다. 한없이 깊은 잠에 빠진 이 고양이를 바라보자니 웃음이 났다. 내 종아리에 올려진 토끼 같은 뒷다리가 사랑스러웠다.


고양이가 주는 평화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고양이가 곁에서 눈을 감고 있기만 해도 그 존재가 주는 온도는 다르다. 그르릉 소리를 내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깊은 위로를 해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로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덕분에 나는 ​위로와 위안으로 충만한 오전​보냈다. 순무는 잠에서 깨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순무가 아직 마당에 있나 자꾸만 확인했다. 눈앞에 없으니 더 보고 싶었다.
이곳을 떠나면 순무가 그리울 것 같다. 아주 많이.

오늘 저녁때 다시 올 줄 알았던 순무는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이다. 머릿속엔 자꾸만 안 좋은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지, 하며 애써 지워본다. 오늘 밤도 무사히 보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처럼 짠하고 나타나 주길. 함께 다시 ​​오전의 평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
비자림은 500~900년까지 산 나무가 있는 곳이다. 우연히 해설사 선생님과 동행하며 숲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비자림은 10월에 비자 열매가 땅에 떨어져 그 향기를 제대로 맡을 수 있다 했다. 이미 조금 떨어진 열매가 내뿜는 향은 정말 좋았다. 은은하게 피어나 코끝을 간질였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10월은 어떨까 궁금했다. 나무에도 암,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기했다. 그 나무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게 연리목이라는 것도 알았다. 직접 보기도 했다. 비자나무의 나이테는 1년에 1~2m씩 자란다고 했다. 엄청나게 굵은 할아버지 나무는 그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줬다.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가만히 서서 900년을 보냈을 나무는 우리 인간을 얼마나 많이 봤을까. 그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사람들은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겠지. 사람들 대부분은 자유를 원하면서 자유를 팔아 일하고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유를 찾아 여기저기 떠난다. 어쩔 수 없이 모순적인 그 모습을 나무는 한없이 가만히 바라봤겠지. 속내를 다 털어놓으려고 찾아간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아주 잠시 행복해 보였을 거다. 숲을 거닐었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살아가리라 다짐해놓고 다시 만난 얼굴은 예전 그대로여서 비웃진 않았을까. 나를 본 나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도 지금 이 느낌을, 감사함을 다 잊어버릴까? 다시 나무에게 돌아갔을 때의 마음이 지금과 같기를 막연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