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21. 어떻게 그럴 수 있지?

2018. 9. 9. 23:53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21]

김녕 세기알 해변

순무가 아침마다 출근 도장을 찍는다. 신기하게 순무에 대한 글을 올린 다음 날부터 순무는 이틀째 아침에 찾아왔다. 잠에서 깨 환기를 시키려고 문을 열면 보일 때도 있고, 순무가 야옹거리며 나를 깨울 때도 있다. 오늘은 후자였다. 오전 6시 반쯤 일어나 한쪽만 겨우 뜬 눈으로 순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일교차가 커져 자다 말고 주섬주섬 옷을 입게 만드는 요즘 날씨 탓에 밖은 서늘했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늘을 봤다. 맑았다. 오늘은 비가 안 오겠구나 싶었다. 저 멀리 파도 소리가 들렸다. 새벽의 고요함 속 들리는 파도 소리, 순무가 사료를 깨물어 먹는 소리가 전부인 시간이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순무의 아침을 계속 챙겨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쉬엄쉬엄 먹는 순무를 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오후가 되자 햇볕이 꽤 강하게 내리쬐어 얼른 선크림과 태닝오일을 발랐다. 태닝이라 하기 민망한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본격적인 태닝을 해보려 했지만 물놀이와 스노클링으로 8월을 다 보내버렸다. (오히려 선크림을 안 바르고 놀아서 예상치 못하게 탔다) 9월이 되니 흐리고 바람 부는 날들이 많아 미루다 보니 어영부영 9일이 됐다. 그동안 두 번 오일을 바르고 먹을 것도 단단히 챙겨 바다 근처를 찾았으나 너무 늦게 도착했거나 모래바람이 일어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래서 오늘을 놓칠 수 없었다. 태양 아래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햇빛이 내 몸을 달군다.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들인다. 그 느낌이 좋다. 아마 광합성 중인 식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내뱉는 단어는 ‘충만함’이지 않을까. 난 평상에 몸을 뉜 그 순간, 잠시나마 충만함을 느꼈다.

집 청소를 하고 코에 바람 좀 넣을 겸 세기알 해변으로 산책을 하러 갔다. 저녁 때 보는 바다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맑은 옥빛 물이 낙조를 기다리는 듯했다. 바다의 표면은 잔잔하게 물결쳤고 그 느낌은 어딘지 모르게 차분했다. 사람들이 밀려왔다 떠나간 무렵이어서 그랬을까. 어스름이 밀려오는 걸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물 안은 모래와 물고기가 헤엄치는 게 비칠 정도로 맑았다. 점점 붉어 오는 하늘을 바라봤다. 상기된 얼굴처럼 타오르는 낙조는 얼굴 반쪽을 구름 뒤에 숨어 보여줬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제주의 하늘은 매일 다르다. 아름답다, 멋있다, 장관이다, 보다 더 좋은 표현, 멋진 표현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 텐데. 난 항상 ‘어떻게 저럴 수 있지?’가 먼저 나온다. 사실 오늘 바다는 마음이 답답해 찾은 곳이었다. 그냥 잠시 바다에 발을 담그고 모래 위를 걷고, 하늘을 바라본 것뿐인데 내 안에 쌓인 무언가가 스르르 녹았다.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지?’다. 설명 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