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20. 왔던 만큼 돌아가는 것

2018. 9. 8. 23:50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20]
벨롱장-교래 자연휴양림(큰지그리오름)

1.
3주 만에 열린 플리마켓 벨롱장은 인산인해였다. 그동안 우천으로 취소된 탓에 사람들이 몰려온 것 같았다. 벨롱은 제주어로 ‘반짝’이라는 뜻이다. 꽤 유명한 제주의 벨롱장에 반짝거리는 건 뭐가 있을지 궁금함을 가득 안고 구경했다. 모자, 인형, 우유, 액세서리, 빵, 그림 등 다양한 판매자들이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을 들고 나왔다. 버스킹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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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유난히 ‘제주스럽다’ 느껴진 사람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까만 피부와 긴 검은 머리, 리넨 소재의 옷을 입고 다양한 액세서리를 착용 한 사람. 내가 무척 하고 싶은 코 피어싱까지 한 모습이었다. 자유로워 보였다. 풍기는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나도 저런 분위기를 내 뿜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스쳤고 그 생각은 계획에 없던 반지를 충동구매하게 했다. 세화 바다는 예쁘고 벨롱장 구경은 그냥 신이 나고, 제주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마구 솟아나고. 그럼 나와 어울리는 액세서리 하나 사야하지 않겠어? 하며. 초록 산호로 만든 반지였다.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사의 돌 같이 생겨 특이했다. 이미 계획에 없던 에코백 하나 사 어깨에 걸친 채로 손에 반지를 꼈다. 미니멀 라이프는 저 멀리 뻥 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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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스러운’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1시가 되자 하나둘 정리를 하는 판매자들이 보였다. 판매자 중 한 명이 에코백에 묵직한 짐을 넣고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팔찌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다. 모두 짐을 싸고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사람 또한 어딘가로 돌아갈 텐데. 캠핑카를 타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러자 다시 나에게도 제주다움이 묻어나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다움은 꼭 눈에 보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데.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자유로워 보이고 싶은 마음인 걸까.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반짝거리고 싶은걸까.


2.
교래 자연휴양림은 정돈된 관광지가 아닌 곶자왈 자체를 볼 수 있었던 곳이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의 합성어로 된 고유 제주어로서, 곶은 숲을 뜻하며, 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서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표준어의 ‘덤불’에 해당한다. 환상 숲 곶자왈, 비자림 모두 곶자왈인데, 교래 자연휴양림을 걷는 숲속을 본 순간 ‘아, 이게 진짜 곶자왈이구나’ 생각했다.


큰지그리오름까지는 약 7km로, 2시간 반이 소요되는 코스인데 나는 3시간이 걸렸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초록이었다. 울창한 나무가 서로 맞닿아 하늘까지 가릴 정도였다. 이끼가 낀 바위, 엉켜있는 나뭇가지, 다양한 풀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새 소리가 들렸다. 까마귀의 까악 소리와 어딘가에서 딱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딱따구리 같았다. 새들은 빠르게 날아다녔고 자주 푸드덕거렸다. 서늘한 공기가 맴도는 숲은 고요했다. 푸드덕거림에 놀랄 정도로. 달팽이를 보고 노루를 봤다. 인기척이 들리자 노루는 빠르게 도망갔다. 노루가 내가 걷는 이곳에 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부터 숲은 점점 더 신비롭게 느껴졌고, 그만큼 더 긴장하게 했다.

큰지그리오름을 가기 전 만난 편백 나무숲도 그랬다. 일정하게 자리 잡은 편백들은 장엄하게 서 있었다. 마치 숲을 지키는 오름의 문지기 같았다. 아름다움과 동시에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위대한 자연을 볼 때면 항상 그랬다. 그건 아마 위엄일 거다. 또 한 번 자연 앞에 작은 존재임을 느꼈다. 문지기들을 지나고 마주한 큰지그리오름 정상은 분화구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나무로 만든 공간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오름의 정상과는 달라 아쉬웠다. 그래도 하늘과 주위 경관을 둘러보니 뻥 뚫려있어 좋았다.



왔던 만큼 돌아가야 집에 갈 수 있다. 오차 없이 왔던 만큼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면 된다.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걷고 또 걷는 수밖에. 빨간 점으로 표시된 시작점에 다시 갔을 땐 마음속에 작은 숲 하나를 키워내고 있었다. 2주 뒤면 난 서울로 돌아간다. 제주로 왔던 만큼. 다시 서울에 간다 해도, 내 안에는 크고 작은 숲과 바다, 해와 달, 낙조와 별이 살아 숨 쉴 거다. 떠난 곳과 도착한 곳이 같지만 내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고 나는 그것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게 이 숲이 내게 건넨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