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33. 다시, 왔던 곳으로

2018. 9. 21. 23:58여행을 기록하자/제주도 한달살기

[33]
김녕 세기알 해변-제주 공항-서울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순무에겐 참치를 줬다. 이별 선물이다, 하면서. 밥을 먹고 분리수거와 쓰레기 배출을 했다. 남은 짐을 정리하면서 틈틈이 마당으로 나가 순무와 놀았다.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는지 몸단장이 한창이었다. 열두 시쯤 집을 나섰다. 외출할 때마다 마당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오늘은 순무와도 같이 찍었다. 순무는 내 옆에 있는 큰 캐리어를 무서워하면서 궁금한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르릉 소리를 내며 내 다리에 몸을 비비는 순무를 만져주며 말했다. 나 이제 진짜 가, 잘 살아야 해 순무야. 순무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 지 대문 한 쪽에 핀 풀을 뜯어 먹기 바빴다. 그러다 집 근처로 따라 나와 차에 짐을 싣는 것을 그늘 밑에 앉아 가만히 바라봤다. 안녕!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이젠 순무도 알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멀리 갔다는 걸. 벌써부터 순무가 보고싶었다.


정신없이 공항에서 빠져나왔다. 빽빽한 건물이 나무처럼 심겨 있는 풍경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50분이라는 시간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짧게 느껴졌다. 한 달 만에 지하철을 타고 집을 찾아갔다. 8시가 넘은 시간에 자유롭게 다니는 게 어색했다. 지하철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공항철도 창밖으론 빛나는 도시의 풍경이 이어졌다. 역시 서울은 도시구나. 고작 한 달인데 나는 시골 사람이 다 된 것 같았다. 지하철 타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집 주변에 도착해 아파트를 올려다봤을 땐 15년을 산 집인데도 어색했다. 이렇게 높았나 싶었다. 집 안에 들어와 이곳 저곳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우리 집인데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렴풋이 다 기억이 나는데 어색했다. 그 기운을 떨치려 짐 정리를 했다.
이제 현관문을 열면 순무와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왔다. 천장이 높아 뛰어도 손에 닿지 않고 화장실에 벌레도 없고 비가 와도 새지 않는 곳으로 왔다. 보일러를 누르지 않아도 뜨거운 물이 나오고 빨래를 널 때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빨래집게가 필요 없는 곳으로 왔다. 나의 시작점으로, 다시 왔다. 갔던 만큼 돌아온 거다. 그뿐 인데 아주 먼 길을 떠났다 온 사람처럼 마음이 헛헛하다.
내가 떠나온 곳, 아름다운 나의 섬 제주는 그림 같은 자연을 보여줬다.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찰나의 순간들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아마 오래오래 내 안에 꽃 피우고 열매를 맺을 기억들일 거다. 물결치고 파도치고 노을 지고 바람 부는 내 안의 기억들을 들여다봐야겠다. 당분간은, 천천히 살펴봐야겠다. 그래야 헛헛한 마음을 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