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괜찮은 밤

2018. 10. 10. 23:24에세이 하루한편



  아침에 일어나 눈을 깜빡이니 오른쪽이 뻐근했다. 이틀 전 다래끼가 났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 주변이 당겨지면서 불편했다. 눈덩이 중앙은 붉게 부어올랐다. 주위만 만져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열감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거울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붓기 때문에 오른쪽 눈 쌍꺼풀이 아예 없어졌다. 양쪽이 다른 눈을 보니 난 쌍꺼풀 있는 쪽이 낫겠군하고 생각했다. 더 두다간 저번처럼 흉이 남을 것 같아 얼른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약을 먹으면 금방 가라앉을 거라고 했다. 삼일 치 약과 안약, 그리고 인공눈물을 처방받았다. 정말 약을 한 봉 먹었더니 가라앉았다. 염증약이라던데, 효과가 빨랐다.

  교보문고를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오후 두 시 반, 문득 어제 이 시간에도 외출했었다는 게 생각났다. 오늘도 같은 시간에 같은 목적지를 같은 방식으로 갔다. 글 작업을 위한 노트북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27만 원 이었다. 20만 원 대 노트북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걸 내가 사게 될 줄은 더 몰랐다. 여기저기 가지고 다니며 글을 쓸 단순한 목적으로 구매했다. 집으로 돌아와 잘 되는지 확인하며 느려 터진 화면을 봤다. 문득 든 생각은 눈을 낮추면 생각보다 날 기다리고 있는 게 많겠다는 거였다.

  저가형 노트북을 사면서 애플의 맥북을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 제품은 생각보다 아주 느렸다. 유튜브도 가끔 끊겼고, 내 데스크톱보다 3~5초가량 느렸다. 그러니 답답해서 아무래도 잘못 산 건가, 싶다가도 한글을 켜 생각에 자판을 아무렇게나 눌러 글을 써보니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거였다. 내가 이 물건을 산 목적을 다시 생각해봤다. 글쓰기용이었다. 다른 것도 필요 없고 오로지 글만 쓰면 된다. 그 용도론 손색이 없었다. 1.17kg, 꽤 가볍고 저렴해서 막 써도 부담이 없는 물건이었다. 구매를 결심했던 대로 여기저기 쏘다니며 쓰기에 적합했다. 더 좋은 기능이 필요 없었다.

 

  만족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부터 주변 관계, 처한 상황 등을 따져보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거다. 하지만 난 조금씩 눈높이를 낮춰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꽤 많다는 것도 깨달았으니까. 그럼 내가 더 좋았으면, 하고 바란 것들이 당장 크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갖고 싶은 물건, 내가 바라는 환경과 관계 등이 따지고 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살면서 좋은 점을 찾지 못하면 어디에 가든지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현재 상황에 만족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각자의 상황이 있으니 내가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함이 있을 테니까. 그저 난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의미였고, 그래서 만족한다는 거다. 다래끼가 나서 약을 먹었는데 부작용 없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과 어제 갔던 교보문고를 다시 가며 같은 길이지만 하루 만에 변한 날씨를 느꼈다는 것, 그리고 노트북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었다는 것 모두 다행이었다는 거다.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는 말이다.

  ‘이만하면 괜찮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엄청 좋지 않아도 그렇다고 엄청 나쁘지도 않네.’ 이런 생각들은 더 작은 것에 귀 기울이게 한다. 그럭저럭 괜찮은 생활이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기쁨의 최고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그 안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또다시 속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이만하면 괜찮네. 마법의 주문 같은 이 말을 생각하면 마구잡이로 날뛰는 생각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느낌이 든다.

  이렇게 글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으니 꽤 괜찮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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