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Christopher Robin, 2018)/ 다시 만난 나의 친구

2018. 10. 8. 22:36글쓰기 우당탕탕/ 나만의 영화잡지



  잊고 있던 나만의 친구, 곰돌이 푸를 봤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인형 친구 한 명쯤은 있었을 거다. 난 유난히 인형을 좋아해 고등학생 때까지 머리맡에 수십 개의 인형을 두고 잤다. 그러니 어렸을 땐 오죽했을까. 크리스토퍼 로빈처럼 나에게 곰돌이 푸는 특별한 친구였다. 만화를 봤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아마 귀여운 외모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다. 노랗고 부들부들한 털에, 볼록 나온 배를 내밀며 슬며시 웃고 있는 얼굴이 좋았다.

  유치원 가방에 곰돌이 푸를 넣어 몰래 가져간 적도 있다. 나보다 작은 인형 친구가 내 가방 안에 들어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진짜 친구와 함께 갔던 것처럼 기분이 좋아 들떴다. 틈날 때마다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알록달록 가방 지퍼를 열어 푸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잘 있다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기뻤다. 푸의 딱딱한 까만색 코를 만져보면 웃고 있는 입처럼 나도 슬며시 웃었다. 들킬까 봐 몰래 가방 문을 닫아 두었다. 둘만의 비밀인 셈이었다. 푸는 나와도 친구였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어느새 나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결혼해서 아내와 딸이 있는 어엿한 가장이었다. 동심을 그린 영화에서 꼭 나오는 얘기처럼, 로빈은 푸를 잊는다. 10년이 지나도 아니 영원히 널 기억할 거라 말했던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돼 있었다. 가방 회사 윈슬로의 팀장이 된 로빈은 쉴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는 푸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잊는다. 길을 잃어버린 그는, 우연히 푸와 다시 만나게 된다.

  “어디론가 가다가 기다려보면, 그 어딘가가 내게 오기도 해.”

푸는 로빈을 기다렸다. 이요르, 티거, 피글렛도. 그들은 로빈과 함께 놀던 모습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로빈 뿐이었다. 네모난 가방에서 계속 종이를 꺼내 뭔가를 읽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어진 모습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에 함께 기뻐했었던 것과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달라진 로빈의 모습을 보며 푸는 말 한다.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대단한 뭔가를 하게 되지!” 그리고 덧붙인다. “아무것도 않는 게 불가능하다고들 하지. 나는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로빈은 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꿈도 못 꿀 배부른 소리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눈을 돌려 주위를 바라본다. 현실 보다 더 중요한 것,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게 된다. 가족, 둘도 없는 친구들을. 그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친구가 된다.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면서. 로빈은 다시 길을 찾았다. 잊고 있었던 그 만의 길을 걸어간다. 푸와 친구들이 반겨주는 숲으로,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아마 그는 한동안 외롭지 않을 거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쭉 그럴 것 같다.

 

  영화를 보며 내 동심을 깨면 어쩌나 싶었던 우려가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푸와 로빈이 서로 꼭 껴안는 장면에선 내 어린 시절 인형 친구 푸가 보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대단한 뭔가를 하게 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야말로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매일을 살고 있는데. 그래도 뭔가를 계속하고 있으니 내 친구 푸의 말을 진짜 믿어 볼까? 그럼 진짜 대단한 뭔가를 하게 될까? 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우선 오늘은 저 말만 생각해봐야겠다. 똑똑한 친구니 믿어도 될 거다.



(다시 만나 행복해!)